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부처님이 계셨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사찰이나 박물관에서 여러 부처상을 접해왔다. 종이로 만든 것은 처음인데, 그래도 그예 그 부처였다.

창가로 드는 몇 푼쯤 되는 햇살을 업고 있었다.

 

2023-5-8

 

무심한 듯, 멍한 듯.. 왼속으로 수인을 취하고 있는데 그 모양새가 분명하지 않다.

내가 아는 어떤 자를 닮았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부처는 금칠을 해도, 청동이나 종이로 만들어도 각각의 표정이 있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뒤의 표정은 만든 사람의 손길이나 마음에 따라 각각인 것일까.

깨달음도 각자가 다를까 싶다.

연꽃도 색과 크기가 각각인 것처럼.

 

 

《삼국유사》에는 달달박박(怛怛朴朴) 과 노힐부득(努肹夫得),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름부터 범상찮은 이들은 친구사이며 세속을 벗어나 도(道)를 구하기 위해 승려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백월산무등곡'에서 도를 얻게 된다는 신비로우면서도 찜찜한? 이야기.

찾을 수도 열수도 없는_너무 넓고 너무 커서_ 불교의 문.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https://www.history.go.kr/)《삼국유사》  [부득과 박박이 관음보살을 만나 부처가 되다.] 번역을 옮겼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석만 삭제하거나 편집했다.

번역문 자체는 손대지 않았다. 다만 괄호 안의 초록색 글은 내 생각을 붙여봤다. 뻘짓이다.

 

백월산무등곡 북쪽에 기거한 달달박박, 동쪽에 기거한 노힐부득.

이들은 이제 일생의 거부 못할 유혹에 빠진다.

 

- 아 래 -

 

(백월산무등곡에 기거한 지) 3년이 채 못된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4월 8일, 즉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 나이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자태를 한 낭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을 풍기면서 뜻밖에(원문이 俄然(아연)으로 나와있다. '갑자기 나타나서'라고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북암(北庵)에 와서 묵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쳤다.

 

가는 길 해지니 산은 첩첩 저문데

길 막히고 인가 멀어 이웃도 없네

오늘은 이 암자에 묵어 가려 하오니

자비로운 화상이여 노하지 마소서

 

박박이 말하기를, “난야(蘭若)(주석에 '사원'이라고 했다.)는 청정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삼으니, 그대가 가까이할 곳이 아니오. 이곳에 지체하지 마시오”라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기(記)에서 말하기를, “나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으니 혈낭(血囊)으로 [나를] 시험하지 말라”라고 하였다.(어떤 기(記, 기록?)인지 알 수 없다.

혈낭, 즉 피 주머니는 사전적 의미로 '육신'을 말한다. 나는 '몸뚱이'라고 풀어 주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박박의 이 말은 모순이다. 그의 말처럼 욕망이 이미 재처럼 식어버린 상태라면 여자에게 시험하지 마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박박에게 거절당한) 낭자가 남암(노힐부득이 있는 남쪽 암자. 앞부분에서는 동쪽에 있다고 했다.)으로 돌아가서 다시 앞서와 같이 청하자, 부득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로부터 이 밤에 왔소?”라고 하니(박박과 부득은 둘 다 깨달음을 원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다. 부득은 여자의 상황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낭자가 대답하기를, “담연(湛然)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현사(賢士)께서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것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주석에 '범어로 정각(正覺)·도(道)를 얻기 위해 닦아야 할 길이라고 했다.)를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게(偈) 한 수를 주었다.

 

해 저문 첩첩 한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없네

소나무와 대나무 그늘은 더욱 깊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자고 가기를 청함은 길 잃은 탓 아니고

높으신 스님을 인도하려 함인 것

원컨대 나의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냐고 묻지 마소서

 

부득스님이 게를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수순(隨順)함도(불교용어로 수순중생隨順衆生이 검색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따른다로 보면 될 것 같다. '낭자의 뜻에 따라야 할 상황이군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인데, 하물며 궁벽한 산골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홀대할 수야 있겠소?”라고 하고,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하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염송에만 전념하였다. (희미한 등불 아래의 염송이라고 했다. 불도 역시도 이미 희미해진 상태인 것이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가 [부득을] 불러 말하기를, “제가 불행히도 마침 해산기가 있으니 화상께서는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은히 밝히니 낭자는 벌써 해산하고 또 다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원문의 흐름에 따라 '낭자가 해산을 했다. 그리고 목욕을 하고 싶다고 했다.'로 하는 것이 더 좋다.)

 

노힐의 마음에는 부끄러움두려움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불쌍한 생각이 더욱 더해서 또 통을 준비하여 [그] 속에 낭자를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켰다. 조금 있다가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서고 물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이 깜짝 놀라자,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노힐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좇았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그 옆을 보니 문득 하나의 연화대 (蓮臺)가 생겼다. 낭자는 그에게 앉기를 권하자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大師)가 대보리(大菩提)를 성취하도록 도운 것입니다”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신비롭다. 불교신문에는 중생을 돌보라는 가르침을 담은 이야기로 설명한다.

관음보살이 노힐부득을 돌본 것인가. 중생으로 화한 관음보살을 노힐부득이 돌본 것일까. 해산 후 함께 목욕하자는 낭자(관음보살)의 청유는 또 무엇일까?

부득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다른 말로 교차된 욕망일 것이고, 불쌍한 생각은 승려로서의 자비심으로 읽으면 될까...?

어떤 글(박희병의 「한국전기소설의 미학」)에는 '종교적 계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비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이야기라고 설명하고 있더라. 부득의 자비는 해산 후 목욕을 원하는 낭자에게 더운 물을 제공한 것이고 관음보살의 자비는 자신이 몸을 씻은 물로 부득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욕망)을 씻어 준 것이리라.

관음보살. 중생의 괴로움을 자비로 구제해 주시는 분 아닌가?

나는 관음보살의 파격이 인상깊다. 부득의 욕망에서 도를 피우게 한 파격. 

 

박박은 노힐이 오늘밤에 틀림없이 계를 더럽혔을 것이니,(누구 눈에는 누구처럼 보이는 법이니까...) 그를 비웃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르러 보니 노힐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을 발하고 [그] 몸은 금빛으로 단장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하니, 노힐이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박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업장(障)이 무거워서 다행히 대성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대덕은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으니, 원컨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마시고 일을 모름지기 함께 했으면 합니다”고 하였다. 노힐이 말하기를,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박박이 또 목욕했더니 역시 앞서처럼 무량수(無量壽)를 이루어 두 존상이 엄연이 상대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드물고 드문 일이다”고 하니, 두 성인이 [그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설해주고 온 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이후의 이야기는 넘어가고 뒷부분에 있는 일연(삼국유사의 저자이다.)의 평만 옮겨본다 )

 

논의하여 말한다. 낭자는 부녀의 몸으로 감응하여 섭화(攝化)한 것이라고 하였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선지식(善知識)으로 11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음이 환해탈문(幻解脫門)과 같다고 했으니, 이제 낭자가 순산한 그 미묘한 뜻도 여기에 있다. 그가 준 글을 보면 애절하고 완곡하여 사랑스러우며 완연히 천선(天仙)의 의취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수순함과 다라니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끝 구절은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소서’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유속(流俗)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낭자가 중생의 뜻을 따라주었다는 말만 희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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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더러운(!) 진흙에서 핀다.

부득과 박박은 관음보살의 목욕물로 깨달음을 얻었다.

더럽다 깨끗하다는 계율은 세속의 번뇌에 밑줄을 그은 것에 불과하다.

종이로 만든 부처상을 다시 본다.

관음보살인지 뉘신지 .... 모든 부처의 얼굴이 다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의 번뇌와 육신의 욕망을 꾸짖지 않고 자신의 세계_자비_로 품어서 깨달음을 주신다니정말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어디 계시나요?

 

맥주 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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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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