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 너희들 오랜만에 왔네.

- 네, 어머님.

- 그래, 아버지 뵈러 왔다고?

운동장 따라 내려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거기 평상에 계실거다.

그리고 집에 가기 전에 밥 먹고 가라.

 

찌는 듯한 더위였지만 간혹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겨드랑이를 스치며 땀을 식혔다.

느티나무는 거의 수직으로 내리 쬐는 햇빛 아래서도 대단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그늘로 들어섰는데도 평상까지는 한참 멀어 보였다. 흰색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평상 위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 아버님, 저희들 왔습니다.

- 찬이 친구들이냐? 그래, 절은 안해도 된다. 거 앉거라.

 

명석은 잔을 받아서 고개를 돌리고 소주를 마셨다. 진영이는 안주를 집적대며 명석의 눈치를 봤다.

 

- 아버님, 찬이는 일본에 간 것이 확실합니다. 편지에 그쪽 가구공장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 그래? 그렇구나. 젊은 놈이니까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지.

 

네 홉 소주병은 반쯤 비워져 있었다. 명석은 연거푸 마신 소주 두 잔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미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진영이의 눈치에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명석은 주머니에서 누런색 시계를 꺼내 양철 밥상에다 공손히 올렸다.

 

- 응? 이거 내 시계 아니냐?

- 네, 아버님.

저희는 몰랐습니다. 찬이가 일본에 간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고... 또...그냥 술을 사겠다고 했고... 아버님 시계를 전당포에 맡긴 것은 몰랐습니다. 편지에 전표가 있었고.. 또.. 시계를 찾아서 아버님께 갖다 드리라고 해서...

- 내 시계를 찬이가 갖고 간 것이군. 젊은 놈 하는 일이...

- 죄송합니다. 우리 모임 회비에서 빌려간 돈도 다 갚고 해서, 저희는 찬이가 공장에서 제대로 일하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 시계는 무슨 돈으로 찾았냐?

- 저희 회비도 있고, 모임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술이 들어갈 수록 찬이 아버지 얼굴이 검어졌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든 탓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명석은 찬이 아버지가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찬이 어머니는 물에 만 밥과 멸치, 그리고 도자기처럼 탱탱하게 솟구친 풋고추를 밥상에 담아 주셨다. 둘 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김 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다. 진흙을 곱게 눌러놓은 것 같은 방바닥은 문지방과 방구석의 높이가 다르게 느껴졌다. 책장에는 기타 교본과 경제학 서적이 꽂혀있었다.

 

- 야, 뭐?  회비를 다 갚았다고?  무슨...

그래도 찬이 놈 덕분에 진탕 놀긴했어. 안그러냐? 여자애들도 기가 막혔지. 걔네들 연락처는 아냐?

 

진영이는 길게 담배연기를 뿜다가 몸을 뒤집으며 베개를 끌어당겼다.

명석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 하여간, 재주가 있긴 있나봐. 갑자기 일본이라니.

- 너는 그걸 믿냐? 우리 회비를 갖고 튀었는데 뭔 재주는 무슨 !

- 공장에서 만든 액자를 주기도 했잖아. 니 방에 하나 세워놨더만.

 

찬이 녀석은 어느 날 명석의 방에 불쑥 찾아와서 며칠 있다가 간 적이 있다. 그때 자기가 만든 액자라며 두고 간 것이 있는데, 아주 고급져 보였다. 가운데에는 육감적인 허벅지에 붉은색 천을 두른 여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명석이 보기에는 아라비아 여자 같았다.

 

- 야, 이거 네놈이 그린거냐?

- 응, 내가 그렸지. 색은 같이 일하는 학생이 칠해줬어. 나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던데. 그건 그렇고 너 돈 좀 있냐? 다음 주에 돈 생기니까 그때 갚을께.

- 무슨,, 뻔뻔한 새끼네 이거. 한번이라도 돈을 갚고 얘기해라. 니가 아직 고등학생인 줄 아냐?

- 뭐? 시발, 그깟 얼마라고... 놀 때만 친구냐? 

 

차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달아오른 얼굴은 식을 줄 몰랐다.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은 아직 비를 뿌리지 않고 있었다. 어머님께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슬리퍼를 신은 찬이 형님이 뛰어왔다.

 

- 너들 거기 잠깐만!

- 아, 형님, 여름에 가게 바쁜 것 같아 인사 드리지 않고 갈려고 했습니다.

- 인사는 됐고.. 영찬이가 일본 간 것은 맞냐?

- 네. 확실합니다.

- 아버지 시계 갖고 왔다며?

- 네, 녀석이 찾아 달라고 편지를 남겨서..

- 그래...?  차 시간 아직 괜찮지? 담배 한대 피고 가라.

- 가게 비워도 괜찮습니까?

- 괜찮다. 형수 있다.  그리고 손님도 별로 없다.

 

세명은 개울물을 내려보며 담배를 피웠다. 개울 위쪽에는 몇명의 꼬맹이들이 물안경에 장화를 신고 개울을 뒤지고 있었다. 찬이 형님은 결혼 후에 이곳으로 내려와서 식당을 운영했다. 찬이 말로는 돈을 많이벌었다고 했다.

진영이는 찬이 형님에게 담배를 한대 빌렸다.

 

- 편지에 다른 내용은 없더나?

- 예. 일본에 있는 가구 공장에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 아버지 시계는 얼마에 맡겼더나?

- .... 그거 얼마 안됩니다.

-  편지에 말이다... 혹시 카메라 얘기는 없더나?

- 예?

- 아버지 시계 없어진 그날, 집에 카메라도 없어져서...

 

원주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둘은 소시지를 사서 서울행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는 상큼한 껌 냄새가 가득했다.

명석이는 찬이가 일본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진영이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 아, 그새끼 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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