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남자

2024. 3

 

 

 

 

 

"형, 읽어봤어?"

"응. 좀 길던데?"

“일단 고마워. 어땠어?”

“내가 예전의 너만 알고 있어서 말이지..한 이십 년 지났는데 옛날 그 소년이 등장한 건가?”

“소년은 무슨...이 나이에 갑자기 뭘 좀 쓰고 싶다는 생각에...”

“남의 글처럼 읽을 수가 없어서 좀 그렇긴 한데...”

 

어렵게 연결된 통화라 P는 빙빙 돌리기가 싫었다.며칠 동안 쏟아져 나온 생각을 앞 뒤로 엮어 두드려댔던 것이지만 그것이 ‘글’이 되는지 궁금했다. 작가로 활동 중인 선배에게 메일에 첨부해 보내면서도 이 사람이 제대로 읽어줄까 의심이 들었다. 보낸 글은 장(章)을 아라비아 숫자 순서대로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꼼수라고 보고 던져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냥 쉽게 얘기해줘 봐. 그게‘글’맞아?”

“.....음..... 회원 중에 너처럼 쓰는 사람이 있긴 해. 어설픈 사소설(私小說)같던데...초보들이 그렇지 뭐야. 모자이크 장난감처럼 대충 꽂아두고선 '멀리서 보면 무슨 모양처럼 보이지 않냐' 라고 하는 것은 남들을 속이는 거 아니겠어?"

“.......”

“그보다는.....재미가 없어.”

“최악이군.”

“그러니깐...너를 좀 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읽혔을 수도 있겠지. 너 좀 주변이 문란한 편 아니었나? 아마도 즐겁자고 한 것인데 결과는 언제나 고통이었을 것 같은 거. 맛있어서 조금씩 갉아먹었는데 알고 보니 자기 꼬리였다는 뱀이야기처럼 말이지."

“형이 기억하는 내가 그런 류였나? 그리고 뱀 이야기 그건 좀 그렇군.....”

“여하튼 재미가 없어. 남들은 일기장 보는 것 같겠지만. 네 녀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겨우 이런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 차라리 그냥 여행을 다녀. 처박혀 있지 말고.”

“.......고마워, 형. 읽어봐 줘서. 조만간 ‘사람들’에서 한번 봐.”

“그럴까?”

 

P는 그에게 글을 보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되뇌었다. 이 정도 충고는 받을만하다며 최소한 엉망진창은 아니라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그렇지만 많은 페이지를 며칠 만에 완성했다는 것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것이 섭섭했다.

재미? P는 담배를 빼들었다. 여자의 상반신이 붙은 지포 라이터를 손바닥에 굴렸다. 라이터는 오래되었고 조잡해 보였다. 그건 재밌자고 쓴 게 아니야. 남들 보라고 쓴 것이 아니라고. 그냥‘글’이 되는 지만 물었을 뿐인데 말이지! 사소설은 또 뭐람?

P는 데스크탑을 켰다. 바탕화면에서 '준기형'이라고 된 파일을 열었다. PgDn키로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Ctrl키와 a키를 눌렀다. 40여 페이지가 반전이 되었다. P는 머뭇거리지 않고 Del키를 눌렀다.

그리고 Alt키와 s키를 누르고 입력을 시작했다.

 

....커서...깜박임..

 


"넌 어두운 표정으로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어. 멍하게 있는 건지, 딴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그래서 재미없으면 그냥 집에 가라고 쏘아붙였더니, 그때 멋쩍은 네 표정도 볼 만했지. 정작 말을 쏟아낼 때는 거침이 없어서 의외였어. 제법 말을 잘하긴 했어. 다른 녀석들과는 달라 보였지. 꿈꾸듯이 말하는 게.

그때 나는 알았어. 넌 혼자 놀기를 잘한다는 거."

 

여자는 그렇게 다가왔다. 남자는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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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없다

▒▒▒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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